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브르타뉴 절벽의 시선과 비밀 초상화, 모닥불 축제와 오르페우스 신화, 비발디 사계와 28페이지 결말)
목차
객석 맞은편의 마리안느를 의식하면서도 끝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휘몰아치는 비발디 '사계' 선율 속에서 벅찬 눈물과 미소를 토해내던 엘로이즈의 마지막 옆얼굴에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감정의 파도를 경험했던 영화입니다. 2019년에 개봉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은 18세기 프랑스 브르타뉴의 고립된 외딴섬을 배경으로,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와 그녀의 결혼 초상화를 은밀하게 그려야 하는 여성 화가 마리안느 사이에 피어난 짧지만 영원한 사랑을 눈부신 미장센으로 그려낸 걸작입니다.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전 세계 영화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이 작품은, 남성 중심적 시선을 완전히 걷어내고 대상과 주체가 서로를 온전히 동등하게 응시하는 새로운 영화적 지평을 열었습니다. 아델 에넬과 노에미 메를랑의 섬세하고 폭발적인 눈빛 연기는 침묵조차 하나의 우주로 탈바꿈시키며 관객들을 잊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인도합니다. 이 글에서는 훔쳐보는 화가와 거부하는 모델의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관계로 변모해 간 시선의 역학부터, 밤의 모닥불 축제와 오르페우스 신화의 재해석을 통해 확인한 연대의 온기, 그리고 헤어짐 이후에도 28페이지의 자화상과 비발디 콘서트홀을 통해 영원히 기억되는 찬란한 결말까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브르타뉴의 바람 부는 절벽과 비밀 초상화: 훔쳐보는 관찰자에서 마주 보는 주체로의 변화
18세기 후반, 화가 마리안느는 밀라노 귀족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를 비밀리에 의뢰받고 거친 파도를 건너 브르타뉴의 외딴섬에 도착합니다. 수녀원에서 막 나온 엘로이즈는 원치 않는 결혼에 저항하며 앞선 남성 화가의 초상화 모델을 완강히 거부해 얼굴 없는 미완성 캔버스만을 남긴 상태였습니다. 백작 부인의 지시에 따라 마리안느는 낮에는 엘로이즈의 산책 동무로 위장하여 그녀의 귀, 입술, 손동작, 시선 하나하나를 몰래 훔쳐보고, 밤이 되면 방 안에서 기억에 의존해 캔버스에 붓질을 해나갑니다.
하지만 훔쳐본 관찰자의 시선으로 완성된 첫 번째 초상화는 당시 관습적인 아카데미 화풍에 갇힌 생기 없는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림을 보여준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이게 정말 나인가요? 당신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고작 이런 존재인가요?"라며 날카로운 비판을 던집니다. 죄책감에 초상화의 얼굴을 문질러 지워버린 마리안느 앞에서, 엘로이즈는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며칠 동안 정식으로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일방적으로 대상을 재단하던 관찰자의 권력은 허물어지고, 서로의 시선이 동등하게 교차하는 순간 화가와 모델은 마침내 영혼의 깊은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모닥불 축제의 불꽃과 오르페우스 신화: 규범 너머에서 피어난 연대와 영원한 기억
백작 부인이 저택을 비운 일주일 동안, 저택은 신분과 위계가 사라진 완벽한 여성들의 해방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어린 하녀 소피와 함께 주방 식탁에서 평등하게 카드를 치고 음식을 나누며,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소피의 낙태를 온 힘을 다해 돕고 그 아픔을 함께 캔버스에 기록합니다. 이 기묘하고도 평화로운 유대는 밤의 모닥불 축제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섬의 여성들이 악기 없이 오직 목소리와 발구름만으로 라틴어 합창곡 'Fugere non possum(도망칠 수 없어)'를 노래하는 가운데,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너머로 두 여인은 넋을 잃은 채 서로를 응시합니다. 자신의 드레스 자락에 불길이 옮겨붙은 줄도 모른 채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엘로이즈의 시선은 억압된 욕망이 맹렬하게 깨어나는 눈부신 순간을 완성합니다.
저택의 서재에서 세 여성이 함께 읽는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이별을 앞둔 두 연인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왜 오르페우스는 지하 세계를 벗어나기 직전 뒤를 돌아보아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잃었는가에 대해 마리안느는 "그는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것"이라며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하려는 예술가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반면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봐요'라고 먼저 말했을 수도 있지 않나요?"라며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닌 주체적인 결단을 내린 여성의 시선으로 신화를 전복합니다. 닥쳐올 사회적 운명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비탄에 젖는 대신 남은 시간 동안 서로의 존재를 영혼에 또렷이 새기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기억을 직조합니다.
28페이지의 자화상과 비발디 '사계' 결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삼켜낸 사랑의 환희
약속된 일주일이 끝나고 백작 부인이 돌아오자, 두 사람의 가슴 시린 작별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작은 소지품 거울 덮개 안쪽에 자신의 얼굴을 자화상으로 그려주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지닌 책의 28페이지 위에 마리안느의 나신을 조그맣게 그려 넣어 서로의 징표를 교환합니다. 저택 문을 열고 떠나려는 마리안느의 등 뒤로 엘로이즈는 신화 속 에우리디케처럼 나지막이 외칩니다. "뒤돌아봐." 그 말에 마리안느가 뒤돌아보는 순간,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문가에 선 채 처연하게 작별을 고하는 엘로이즈의 환영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잔상으로 남습니다.
세월이 흘러 파리의 살롱 전시회에서 마리안느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그려진 엘로이즈의 새로운 초상화를 마주합니다. 그림 속 엘로이즈의 손가락은 책의 '28페이지'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고,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신호는 여전히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밀라노의 오페라 극장, 2층 발코니 객석 맞은편에 앉은 엘로이즈를 발견한 마리안느의 시선은 멈춥니다. 오케스트라가 과거 마리안느가 하프시코드로 서툴게 연주해 주었던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Presto)'을 격정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엘로이즈는 맞은편의 마리안느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휘몰아치는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과 환희가 뒤섞인 미소를 번갈아 지어내는 엘로이즈의 클로즈업 옆모습 결말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찬란했던 사랑을 영원히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임을 웅변하며 보는 이의 심장을 세차게 뒤흔듭니다.